본문 바로가기
책리뷰3) 문학소설,에세이,시

데미안 - 헤르만 헤세

by DORR 2022. 4. 28.
728x90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열린책들 / 리디셀렉트

 

 

'데미안' 하면 떠오르는 것은 유명한 문구,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와 '아프락사스'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작고 오래되고 낡은 초등학교 교실 한 칸짜리 도서관에서다.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 사이에서 두껍고 거칠한 종이에 세로로 씌어있던 고전 소설들을 읽었다. 대지, 부활, 제인 에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등등. 고전을 많이 읽었었 시절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지만, 대지를 읽으며 주인공 여자가 불쌍해서 눈물을 글썽이던 기억과 데미의 편지에 등장한 '아프락사스'가 굉장히 생뚱맞고 인상적이었다는 느낌만 남아있다.

 

이후 몇 번 더 읽다 말았던 것 같은데 이번 독서 모임을 통해 완전한(?) 재독의 기회를 가져서 매우 즐거웠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다시 읽은 데미안은 재미있기도 하면서도 복잡하고 모호했다.

주인공 싱클레어의 치열한 내면과 성장을 그리고 영혼을 충족시키는 것을 찾기 위한 여정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평생 단 한 번 겪는 운명이다. 어린 시절이 바스러지면서 서서히 붕괴된다. 모든 정겨운 것들이 우리 곁을 떠나려 하고, 우리는 돌연히 우주의 고독과 치명적인 냉기에 에워싸인 것을 느낀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그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으며,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잃어버린 낙원의 꿈, 모든 꿈들 중에서 가장 고약하고 가장 살인적인 꿈에 일생 동안 고통스럽게 집착한다.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 경험은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내용이나 상황은 다르지만 세계가 좁았던 시절, 그것만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무언가가 잘못되면 그것으로 삶이 끝나버리는 것 같은 유년 시절. 그 세계가 종말을 고하는 순간, 사람은 조금은 더 성장하는 것 같다. 더 넓고 선택의 폭이 늘어나며 다양하고 새로운 세계를 접하자 그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데미안처럼 혹은 피스토리우스처럼, 군중 속에서 다른 빛을 내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그는 나처럼 특별하고 독특한 빛을 내며 아직 내가 이를 수 없는 다른 세계와 이상을 품고 있다. 그가 나보다 훨씬 앞서 있지만 그와 나는 때론 연약하고 때로는 강력한 영혼의 무언가로 얽혀있다. 나의 데미안은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이기도 했고, 기숙사 맞은편 방에 사는 언니기도 했고 만화 쿨핫의 서영전이라는 케릭터이기도 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이기도 했다가 소설가 신경숙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둘 사이를 잘 묶어두고 있다 생각했던 특별한 끈이 풀어지게 되고 나의 데미안 또한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돠었다. 그다음에는 나 또한 아주 평범하고 특별할 것이 없이 이 세상 속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 또한 깨닫게 된다.

 

아아, 이제는 잘 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이 세상에 결코 없다는 사실을!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을 때만 두려워하는 법이거든.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어.

 

나의 여정은 그곳에서 끝난 것 같다. 타인이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지만 결국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에게 특별한 표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후에는 나와 내 삶의 '행복'에 끝없이 집착해서 살아왔다. 그것은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될 것 같다. 다만 행복을 이루는 요소가 시간의 흐름, 상황과 가치에 따라 계속 변해 갈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오. 우리 안에 품고 있는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요. 외부의 형상들을 현실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자신 안의 본연의 세계에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오. 그러면서 행복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일단 다른 것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선택할 수 없게 되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쉽고 우리가 가는 길은 어려워요.

 

싱클레어가 자아를 찾아 내면으로 침잠해 가는 과정은 나에게는 굉장히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아마 이토록 치열하게 자신과 운명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히 후반의 숱한 꿈들, 에바 부인과의 사랑, 데미안과의 합일에 이르는 마지막에는 물음표만이 나타났다. 시간이 좀 더 다른 경험들이 쌓이고 하면 다르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자신의 책무는 임의의 운명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어 그 운명을 자신 안에서 흐트러짐 없이 끝까지 살아 내는 것이었다.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 신과 악마, 추악한 것과 신성한 것, 남자와 여자가 뒤섞여 있는 존재이다. 두 개의 세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세계의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아브락사스에게 간다. 오랜 시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선과 악의 구별은 숨 쉬듯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경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신앙적인 혹은 기독교 윤리 안에서 실천해야 할 사랑과 개인의 내적 욕망과 악과의 다툼도 힘겹지만 익숙하다. 교회에서는 회개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순종하며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나 자신의 뜻과 욕망에 따르며 산다. 이렇게 분열되어 있는 두 세계에 속해 있지만 결국은 나 자신이다. 이쪽도 나, 저쪽도 나인 것이다. 두 가자의 나를 적절히 융합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노력을 해야 힘겨운 갈등이 끝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두 개의 세계로 나뉘지 않는다. 어느 쪽이 절대 선이고 어느 쪽이 절대 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장발장이 빵을 훔친 일을 절대 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남의 물건을 훔친 사실은 죄다. 그러나 굶주리고 죽지 않기 위해 '빵 하나'를 훔친 그의 의도가 '철저한 악'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는가.

 

또 이런 생각도 해본다. 평범하고 표식이 없이 순리에 따르는 삶이 어때서. 선과 악은 분명 존재하고 자신의 욕망에만 사로잡혀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악을 행할 때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이 끝도 없이 일어난다. 때로는 선과 악으로 나뉜 세계 혹은 옮고 그름으로 나뉜 세계가 질서를 유지하게 해주기도 한다.

 

책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책에서 많은 것을 얻고 느끼지만, 결국 깊숙히 닿은 문장이나 알림은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그것으로 자신을 알아갈 수 있다. 몇 년이 지나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