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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3) 문학소설,에세이,시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by DORR 202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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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문학동네 / 리디북스

 

 

 

채식주의자. 처음 접한 한강의 책이었다.

뭐랄까. 기괴하고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한 여자의 깊숙한 곳에 들어차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공허함 같은 것에 마음이 쓸렸다.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일삼는 주인공에게 공감이 갔고, 주변 사람들과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했다. 독서 모임에서도 채식주의자로 이야기를 나눈적도 있었다.

 

두번째 접한 한강의 책이다. 분명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면 노멀하게 남.여 주인공이 나올거라 생각했다.

 

초반에 명료하게 시작한다. 경하의 준비와 유서, 그리고 인선과의 인연, 그녀의 부름. 인선에게 간 경하는 그녀의 손가락이 절단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가 키우고 있는 앵무새 '아마'를 위해 제주도로 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경하는 제주도로 향한다. 추운 날씨에 눈이 몹시 쏟아지고 밤 늦은 시간이다. 겨우 통화 된 인선의 병실에서는 무슨 일인지 어수선하고 간병인이 받았다가 금세 끊어버렸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잃고 휴대폰도 잃어버린 경하는 겨우겨우 인선의 공방을 찾아간다. 손가락이 잘리고 정신을 잃은 인선이 구급차로 이송되고 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불이 켜져 있었다.

 

인선이 부탁한 아마는 이미 죽어있었다. 경하는 새를 묻어주었다. 그리고 밤이 온다.

 

이 이야기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이것에 있다. 도무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이고 환상인지 모르겠다. 이 책의 주된 테마를 이루고 있는 과거 사건들의 파편이 곳곳에 혼재해 있고 이야기의 시점이 어디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경하는 인선을 만난다. 죽은 줄 알았던 아마도 살아있다.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특히 인선이 건넨 이야기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4.3 제주 사건을 겪은 어머니 이야기였다.

 

4.3 제주 사건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제주에서 무려 3만명이 넘은 사람이 사망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빡이는......

모호하고 어렵고 아리송하기만 하던 이 이야기에 '뭐 이딴 책이 다 있어. 무언가 전하려거든 좀 더 쉽게, 좀 더 알아차리게 그게 더 낫지 않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을 잔뜩 늘어 놓으면 그걸 어떻게 알아먹으란 얘기야, 난 정말 이런 글은 딱 질색이야.' 라고 생각했다. 평점을 주자면 '5점 만점에 1점 이상은 줄 수 없어!' 이렇게.

 

안그래도 어렵고 알 수 없는 글에 제주도 방언은 왜 이렇게 끝도 없이 등장하는지. 중요한 단락 전부가 방언이라 안그래도 가독성이 떨어지는 글이 더더욱 알 수 없는 글이 되어 답답함은 쌓여가고 책을 읽는 속도는 느려지기만 했다.

 

그러나 마지막 챕터를 읽으면서, 그 불꽃 같은 글의 힘을 느끼면서 끝내 울먹울먹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췌 '사랑'이 어디에 등장하느냔 말이다, 묻던 내 물음에 강력하고 거대하고 묵직하게 다가온 사랑. 여전히 눈밭에 떨어지는 잿빛눈처럼 읜색인지 회색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사랑은 촛불의 불꽃만큼 또렷하게 다가왔다. 제주 4.3 사건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불꽃은 더욱 빨갛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꾸역꾸역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우리 나라 역사는 참으로 고되다. 얼마전 분노의 포도를 읽고 1930년대 미국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끔찍했는가 슬퍼했는데, 당장 4.3 제주 사건에만 봐도(비극적인 사건을 비교한다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삶과 죽음'의 권리조차 허용받지 못하는 현실이 처참하기만 하다.

 

인선이 말하는 몇 천구의 유골이 모여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래 사진을 보면 그 끔찍함이 조금이나마 느껴질 것이다.

 

나무위키 : 유골 발굴 작업

 

2021년 현대를 살아가면서 과거의 사건들에만 천착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역사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 또한 문제가 된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독재 정권을 이야기로만 듣고 무탈하게 자라온 세대들에게 과거의 사건들은 그저 '역사'의 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때로는 페름기-트리이아스기 대량멸절이나 유럽인들의 동인도 회사나 4.19혁명이나 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에게는 일제 강점기와 6.25를 통해 몇 명의 자식들을 잃고 103세에 세상을 떠나신 외할머니가 계셨다. 지구 곳곳에 세워져 있는 소녀상도 존재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의 생생한 사건을 전하고 있는 목소리와 텍스트들이 남아 우리 곁에 있다.

 

저렇게 유골 발굴 작업에 섞여 있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유골의 주인은 나와 같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귤을 건네면 한평생 습관이 된 반쪽을 잘라 자식에게 주던 사랑많은 어머니와 엄하고 무섭게 굴더라도 자고 있는 자식의 머리맡에서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고 흠흠 돌아서는 아버지와 함께 뛰어놀고 토라졌다가 시시한 말장난에 또 같이 헤헤 웃는 형제, 자매가 있는 사람이었다. 비인간적인 총알에 아직 이루지 못한 꿈과 함께 곁에 있어야 할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과거를 똑바로 응시하고 알아가지 않는 이상, 언제고 저 총알이 나에게 날라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세대는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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