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 산도르 마라이
솔 / 알라딘
삶에서 만난 책 중 가장 좋았던 것이 무엇이나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열정을 꼽는다.
재독이 거의 없는 내게 수 번 읽은 단 하나의 책이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이기도 하다.
무엇이 이토록 내 마음을 끌었을까.
인생을 살 만큼 살아본 노인의 독백이라는 점이 마음을 끈다. 그의 인생은 다양한 축복,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의 통찰력이 있고 아직도 타오르는, 불씨가 꺼지지 않은 열정 또한 간직하고 있다. 그의 독백이 뱉어내는 우정과 사랑, 사람들, 음악, 삶 등 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속에 어떠한 깨달음이, 혹은 작은 알음이 생겨난다. 우리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쉽게 넘길 수 없다. 시간이 흐를때마다 그가 뱉은 말은 전혀 다른 혹은 또 다른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이십대,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이 책은 나에게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자의 의도와 주제와 상관없이 나는 우정이라는 주제에 깊이깊이 생각했다. 잃어버린 우정때문에 고민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물었다.
난 네게 뭐야?
친구가 대답했다.
확신과도 같은 사람 내 축이야
하지만 그 우정은 아주 짧았고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이 책을 읽으며 한강 뚝섬 유원지를 지나고 있었다. 책을 읽다가 가슴이 턱 막혀서 고개를 들었을 때 뚝섬의 야경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야경과 음악, 이 책이 내 마음을 오랫동안 울렸다.
두번째로 읽었을 때는 다른 주제가 다가왔다. 우정 보다는 사람과의 관계, 특히 '다름'이 깊이 다가왔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변화를 겪든 언제나 ‘다른 사람’을 찾기 때문일세. 삶의 가장 큰 비밀과 최대의 선물은 ‘비슷한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일세. 서로 영원히 희구하는, 대립된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긴장이 세계 창조와 삶의 개혁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전기의 교류 같은 것......시선을 두는 쪽에서 일어나는 양극과 음극의 에너지 교환. 이 이원성 뒤에 얼마나 많은 절망과 눈먼 희망이 숨어 있는가!
나는 헨릭보다는 콘라드에게 더 공감했다. 그는 불완전했고 도주했고 마지막 대답까지 회피하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헨릭의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회피해 버리는 그는, 그저 평생 열대로, 밀림으로, 런던으로, 음악으로 도피하는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패배의식과 동경과 질투. 그의 감정을 다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니까.
자네 영혼의 밑바탕에는 갈등, 자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고 싶은 동경이 숨어 있었어. 인간에게 그것보다 더한 시련은 없네.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인간의 심장을 불태우는 동경은 없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세상에서 차지하는 것하고 타협할 때에만 삶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일세.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타협할 줄 알고, 또 이렇게 현명하게 둘어도 삶으로부터 어떤 칭송도 받지 못하는 것을 알아야 하네.(...) 참고 견딜 수 밖에 없어. 그것이 바로 비결일세. 자신의 성격과 본성을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지. 제아무리 많은 경험을 하고 부족한 점이나 이기심, 탐욕을 인식해도 변할 수 없기 때문이야. 우리의 동경이 현세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하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사랑하지 않아도 참을 수밖에 없네. 배반과 신의 없음도 참아야 하고, 자기보다 인품이나 지성이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 참아야 하지. 이 가운데 마지막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일세. 그런데 자네는 이 모든 것을 참을 수 없었지.
다른 성향의 사람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 어느 결합이 우리의 삶에 플러스가 되는 만남일까.
세번째로 다시 읽었을 때는 이 책의 주제, 제목과도 닿아 있는 '열정'에 깊이 빠져들었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이 주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 유시진의 만화 '온'에서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비록 온이 담고 있는 주제는 이 열정을 박탈당한 사람이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열정에서는 그 대상이 사라졌어도 그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 그가 눈을 감을 때 까지 끊임없이 지속 될 그 열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세상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만이 중요하네.
우리 삶의 진실한 내용은 죽은 여인을 향한 이 고통스러운 그리움이 아닐까.
헨릭은 칠십 후 반 나이에 콘라드를 기다려왔다. 41년의 긴 시간, 그와 그녀가 함께 있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그저 기다리고 과거를 되짚으며 세월을 보낸다. 헨릭의 그 41년이란 시간의 무게가, 그 동안 그가 생각하고 사유하고 찾아온 삶의 정수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아름답고 정제된 문장들, 섬세하게 삶의 무게와 비밀들을 훑어내는 시선에는 감탄을 하게 된다.
이번에 독서 모임을 하면서 몇 번째인지 모를 재독을 했다. 누군가에게 이 책은 별 거 아닌 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주파수가 다른 것처럼 책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책을 재미를 위해서 읽지만, 이 책 만큼은 계속 들여다보게 되는 나와 잘 맞는 책인 것 같다. 산도르 마라이의 다른 책도 나쁘지 않았지만 열정 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나는 삶에서 가장 의미있고 나를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무언가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완전하지 않았다. '열정'에서 말하고 유시진의 '온'에서 말하는 완전한 연소, 꺼질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지 열정 같지 않았다. 꺼질듯 꺼지지 않고 미미하게 불이 붙어 있는 촛불 같다고나 할까. 그것은 강력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나에게 무언가를 공급한다. 헨릭 정도의 나이가 된다면, 좀 더 멀리 또 관조적으로 삶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것이 다른 의미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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