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파랑 / 천선란
허블 / 리디북스
SF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읽는 이유의 대부분이 (80% 이상) '재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나에게 SF란 상상력의 놀이터이다. 기발하고 놀라운 상상력. 상상력에 기반한 거대하고 넓은 우주.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의 우주와 차원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나는 쭉 '우주'에 매혹되었다. 정확히는 우주가 갖고 있는 무한함과 그 무한함이 갖고 있는 거대한 가능성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해서 SF는 무한함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그러했고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시리즈가 그러했듯이.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것은 '이것이 SF인가?' 였다. 2035년 근미래 설정이고 주인공이 콜린이라는 휴머노이드라는 것을 제외하면 SF라고 느낄만한 것이 없었다. 물론 스페이스 오페라만이 SF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의 SF장르의 지평은 넓어지고 김보영,김초엽,천선란 같은 심리적이고 감성을 중시한 여성 중심적인 SF가 움직여가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지막 장면으로 시작된다. 휴머노이드 기수 콜린이 투데이에게서 떨어져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다. 3초간의 낙마 시간 중 그는 연재를 생각한다. 우연재는 로봇에 관심이 많은 아이다. 그녀에게는 은혜라는 소아마비로 인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언니가 있고 소방관이었던 남편을 잃은 보경이라는 엄마가 있다.
살아간다는 건 늘 그런 기회를 맞닥뜨린다는 거잖아. 살아 있어야 무언가를 바꿀 수 있기라도 하지.
콜린은 C-27로 불리웠다. 휴머노이드 기수로 만들어졌는데 학습 휴머노이드 칩이 잘못 삽입되었다. 그가 경마장으로 가면서 떠올린 단어는 천개였다. 그는 곧 투데이의 기수가 되었다. 휴머노이드가 개발되자 기수는 인간에서 로봇으로 바뀌었고 말은 가벼운 휴머노이드 기수를 등에 태우고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투데이의 등에서 낙마한 콜린은 폐기될 위험에 처해졌고 연재에게 발견되어 새로운 생명, 제 2의 인생을 살게 된다.
스토리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초중반 부분은 굉장히 지루했다. 끝도 없이 연재와 보경과 은혜의 주변 이야기들이 지지부진하게 늘어지고 내가 SF소설을 보는 것인지 일반 문학 소설을 보는 것인지 모호할 정도로 더디게 흘러갔다. 몇 번이나 그만 읽고 싶었지만 독서 모임 책이였기 때문에 견디고 또 견디고 읽었다. 결론적으로 존버는 승리한다가 맞았지만, 3분의 2가 지나가도록 기승전결의 '기'가 반복되는 기분이었다.
지루한 주변 이야기와 배경이 깔린 뒤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다. 콜린의 수리가 끝나고 연재는 지수와 함께 로봇을 만드는 대회에 참가하고 보경은 로봇이라 거북스러웠던 콜린과 점차 가까워지며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연재는 은혜와 함께 투데이를 살리기 위한 콜린의 계획을 주도한다. 지수와 수의사인 복희, 기자이자 사촌인 우서진, 경마장 직원인 도민주, 연재의 편의점 사장님까지 모두 합심하여 투데이를 살리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작전을 실행한다. 하지만 그 작전 끝에는 콜린과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3%에는 실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보경은 언젠가,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바퀴를 굴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소방관에게 말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보경은 배우를 꿈꿨지만, 그 꿈이 사고로 무너지고 소방관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산다. 하지만 소방관은 금세 그녀의 곁을 떠났고 보경은 두 명의 아이를 위해 꿋꿋히 견뎌내지만 그녀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휴머노이드인 콜린이 한 여러 말들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고 멈춰있던 시간을 움직이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저자가 사람보다 훨씬 더 사람같은 휴머노이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인간을, 우리 주변에 흔하게 있을법한, 다양한 상처와 아픔과 관계의 단절을 갖고 있는 보경의 가족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같은 인간이 아닌 다소 객관적이고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는 콜린의 생각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은혜와 연재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애가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절친한 친구보다는 못하지만 아예 타인은 아닌 수준, 같은 반이어서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지만 서로의 성향이나 관심사는 잘 모르는 1분단과 4분간 거리라고 말하면 적당한 그런 관계였다. 그렇지만 은혜와 연재, 보경 사이에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가 궁금하다. 하지만 콜리가 발견한 그들의 특징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그런 마음을 내비치지 않는다. 강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서로를 위한다고 입을 꾹 다물지만 그것은 더더욱 두꺼운 상처가 되어 거리를 벌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채를 지니고 있는 만큼 더 다가가기 어려웠다 / 인간은 함께 있지만 서로가 같은 시간을 사는 건 아니네요 /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뿐 모두가 섞일 수 없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맞나요?
이야기가 박바지에 달하고 투데이의 구출작전과 함께 인물들이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인물들이 변하자 관계도 변하고 그 역동적인 움직임과 변화들은 감동을 자아냈다. 콜린의 2번째 인생의 마지막, 투데이를 살리기 위한 경기의 낙마로 이야기는 끝이났다. 시작에서 예고한 것처럼 끝이 난다. 하지만 시작과 끝은 사뭇 다르다.
투데이는 결국 콜린의 바람처럼 행복하게 제주도에서 삶을 살게 되고 연재가 아이디어를 낸 다르파로 인해 5년 뒤 은혜는 연재가 선물한 휠체어를 통해 자유를 얻게 된다. 하늘이 아름다워 낙마를 했다는 콜린은 마지막으로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천개의 단어가 모두 파랑이라고 생각한다. 콜린과 이 소설에는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들이 강하게 뒤섞여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인다.
저자는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한다'라는 문구를 보며 천개의 파랑을 썼다고 한다.
초중반의 따분함을 견디자 감동적이고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 온갖 SF소설이 왜 이따위야 했던 불만은 눈녹듯이 사라져갔다. 좋은 이야기란 그런 것이다.
*
그래도 살짝 SF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의 수상소감에서 밝혔듯이 SF를 많이 읽지 못했다는 점이 느껴진다. 박상준 심사위원이 말처럼 2019년 한국 창작 SF가 주목을 받으며 저변이 확장된 탓일 것이다. 주류문학의 배경이 엿보이는 응모자가 장르 SF 문학보다 많았다는 점은 희망적이기도 하면서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SF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 중 한 명으로 소프트한 SF는 끌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SF를 배경으로 하여 개인적인 주제를 부각시키는 주류문학의 방식을 걱정한다. 내가 좋아하는 SF의 매력은 '상상력'이다. '사고의 확장'이다. 가장 좋아하는 SF단편, 테드 창의 '이해'에서 느꼈던 '확장성'과 노인의 전쟁에서 느꼈던 '기발함', 파운데이션에서 느꼈던 '통찰력'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장르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재미'는 SF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 참고로 정말로 추천하는 SF 작품이 둘 있는데 하나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이다. 테드 창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저자이자 화제가 되었는데 파운데이션에 못지 않게 짧은 단편 안에 수많은 생각할거리와 재미를 준 작품이었다. 노인의 전쟁은 페이지가 어떻게 넘어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 기발한 상상력에 작가의 휴머니즘적인 유머코드가 읽는 내내 유쾌하고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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